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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 8주차 下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28th, 2008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의 주제이다. 조금 더 치밀하게 분석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설명하자. 틀림없이 aporia에 부딪칠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치밀하게 분석적으로 문제를 파헤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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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 8주차 上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21st, 2008

이 세상의 참된 모습, 그야말로 실재(實在, 정말로 있는 것)는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파르메니데스)?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참 모습인가(헤라클레이토스)? 세상은 변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즉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형식논리학적으로 따지면 세상은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이에 형식논리학적 사유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제기한 철학자도 있었다. 헤겔이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존재의 논리, 본질의 논리, 개념의 논리를 다루었다. 헤겔에 따르면 A는 A이기도 하고 A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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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 7주차 下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18th, 2008

오늘 다룰 내용은 개물을 개물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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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 7주차 上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18th, 2008

토마스 아퀴나스는 ante rei(사물에 앞서서)로서의 보편자를 인정함으로써 신학을 성립시키고, post rei(사물 뒤에)로서의 보편자를 수용하여 자연 과학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신학과 자연 과학이 각각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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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 6주차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7th, 2008

보편자가 있고 없고를 떠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보편자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보편자가 없다면 같은 사람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보편자를 상정해야 한다. 보편자는 우리 모두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보편성이 가진 성질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대응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자는 것이 보편자 문제의 핵심이다. 보편자가 이름일 뿐인지(언어적 차원), 사유내용인지(사유내용의 차원), 실재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지(사물의 차원)를 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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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5주차 - 下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April 7th, 2008

칸트에서 진짜 있는 것인 세계Welt가 이념으로서 제시된다. 두 번째로 세계 속에 들어가지 않는 ‘나’인 영혼Seele이 제시된다. 세계는 세계이고 영혼은 영혼이다. 둘이 긴밀하게 연관되나 상호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들을 한 통으로 묶어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 누구여? 神이다. 이것이 칸트에서 세 번째 이념이다. 근대 철학자 칸트에서도 신은 여전히 대전제로 남아 있다. 이념은 사실Sache이 아니다. 그런데 필요하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탐구될 수도 없다. 이들은 ‘이런 것이 있다고 치자’고 ‘요청Postulat된 것’이다. 칸트가 신을 요청한다고 하여 그가 철학적 사색을 하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신앙을 갖는 것과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구분하기 바란다. 철학적 성찰로 도달한 결과가 神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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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5주차 - 上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March 31st, 2008

존재는 애매하다. 우리의 논리적 사유를 벗어난다. 이를 빌미로 왜곡된 이설들이 등장할 것이니 이들을 존재론적으로 환원시키자. 보편 양화사, 존재 양화사를 사용하자는 것이 버트란트 럿셀의 입장이다. 우리의 멋진 언어생활이 수학적 개념으로 환원된다. 생산성은 개선되었으나 재미는 없다. 이렇게 한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다. 실체가 없는데 있는 양하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세계의 존재를 엄혹한 현실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취생몽사할 뿐이다. 이제 언어 분석이 무엇을 하는지 기본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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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4주차 - 下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March 27th, 2008

칸트 시대에만 해도 뉴턴의 paradigm은 낯선 것, 생경한 것이었다. 사과가 떨어진다. 그런데 떨어지는 목적은 모르겠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하나의 telos를 향해 간다’는 목적에 입각하여 ‘사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떨어진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목적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이에 대하여 [근대 자연과학자] 뉴턴은 자연과학적 지식으로써 다만 원인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보기에 뉴턴의 자연 과학적 지식은 타당하다. 그런데 한계를 지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타당하다’라고 한정지을 것을 제안한다. ‘지각’ 하지 않고서 세계를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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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4주차 - 上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March 25th, 2008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론의 시조들이다. 철학의 원조 시대에도 이렇게 상이한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두 입장 모두 일리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철학을 공부하려면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한 쪽으로 갔다가 돌아오고, 다시 또 다른 쪽으로 갔다가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one principle로써 설명하려는 것은 철학자들의 꿈이다. 설명이 안 된다. 안 되니 억지를 부린다. 그러다보면 현실은 무시하고 자기 이론만 앞세운다. 그러나 익히 이야기하였듯이 이론에게는 현실을 당해낼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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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 3주차 - 下

Posted in ontologie by darkforce on the March 20th, 2008

A 대상영역 / B 인식가능한 초대상영역 / C 인식 불가능한 초대상영역을 인식론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언젠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가질 수는 있겠으나 현재에 있어 C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A / B / C는 모두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A / B / C에 존재에 관한 원리가 일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 세상 존재에 원리가 없다면(chaos) 세상은 엉망진창일 것이요, 이 세상이 질서(cosmos)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가정해야 예측 가능성을 가질 수 있어서 내일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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